설거지 개똥철학

설거지는 성스러운 활동이다. 음식을 차릴 때의 설레임과 먹을 때의 즐거움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순수한 ‘의지력’만으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 볼록 나온 배 만큼이나 커져버린 중력을 역행하여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돼지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인간의 ‘존엄 유지 활동’이기도 하다.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와인까지 한잔 곁들인 날은 우아한 여운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과, 고무장갑을 끼는 ‘비우아함’에 대한 거부감이 충돌하여 몸이 더욱 무거워진다.

아내가 식사를 마친 후 먼저 소파로 자리를 옮겨 털썩 앉는다. 이건 ‘이제 움직이기 싫다’는 신호다. 내게 존엄 유지 활동을 양보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아이들도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한놈은 화장실로, 한놈은 “잘 먹었습니다”를 외치며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나는 식탁에 홀로 남아 잔반들과 삼겹살이 담겨졌던 그릇을 바라본다. 말라 비틀어진 기름기를 보며 하품을 한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다 먹은 밥그릇에 말라붙은 밥풀들도 덤으로 남아 있다. 후회한다. 미리 물에 담가서 불려둘걸. 더 귀찮아지기 전에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일으킨다. 삼겹살 기름기를 휴지로 닦아내고, 깨끗한 잔반을 다시 반찬통에 담고, 밥그릇과 반찬그릇은 싱크대 뜨거운 물에 담가둔다. 그리고는 행주로 식탁을 닦는다. 나는 수세미에 거품을 풀고 그릇을 씻는 일보다 이런 뒷정리가 더 싫다. 한젓갈씩 남은 반찬들을 보면 치우기 귀찮은 마음에 괜히 아이들에게 한마디 한다. “꺼낸건 다 먹어야지. 잘먹어야 키가 커, 이놈들아.” 물려준 유전자에는 모른 척 고개 돌리고 괜히 잔반과 키를 엮어내는 잔소리라니.

뒷마무리는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이다. 화려한 순간은 모두 지나가고, 관심이 떠난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노동하는 일이다.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서도 정작 인정은 받지 못한다. 상을 차리는 사람은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 부담감이 있지만 그 성과의 열매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잘 먹었어요. 음식 너무 맛있어요." 제일 앞단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릇을 닦으며 문득 사회의 곳곳에서 우리의 뒤를 닦아주는 고마운 분들을 생각한다. 조망받지 못하는 분들에 대한 관심은 설거지처럼 우리의 ‘의지’를 발휘해야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노고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되고 만다. 그들에게도 우리 사회의 열매는 잘 분배되고 있는건지, 혜택받는 자로서 꾸준한 관심을 기울이는건 최소한의 인간된 도리인 것 같다. 아내도 오랜시간 가족 뒤에서 남겨진 일을 묵묵히 해왔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식기세척기를 사줄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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