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과 모임

“그걸 나혼자 어떻게 다 해. 김장하려면 준비할게 얼마나 많은데.” 아내의 말 한마디에 오늘 모임에 못나가게 됐다. 10여년만에 예전 회사 동료들을 만나기로 했었다. 지지고 볶으면서 엄청 가깝게 지냈던 9명의 동료들이 모두 일정을 맞추어둔 자리인데 너무 아쉽다. 모임날짜를 미뤄보려고 살짝 시도해봤지만 다들 일정을 다시 맞추는게 쉽지 않았다. 대부분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라서 일부 인원의 스케줄 변경이 어려웠다. 결국 내가 참석을 포기했다.

토요일에 김장을 담근다. 작년까지는 엄마가 오셔서 함께 도와주셨다. 올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내가 엄마 도움없이 나랑 둘이 해보겠다고 한다. 나는 옆에서 서포터 역할만 하면 될터이니 그러겠노라고 아무 생각없이 동의를 했다. 까짓거 금요일에 잠깐 짬을 내서 함께 장을 보고 후다닥 준비하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임 약속도 오늘(목요일)로 잡은 것이다. 그런데 김장을 너무 얕봤다. 아내의 깊은 뜻을 파악하고 있지도 못했다. 아내는 지금까지처럼 절인 배추를 사서 담그려는게 아니라, 생배추를 직접 하나하나 다듬고 씻고 소금으로 절이는 작업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적은 양도 아니고 우리집은 보통 김장할 때 30~40 포기를 담근다. 아내가 김치 매니아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모자라 여름이면 겉절이도 자주 만들어 먹는다. (자연히 우리 식구들은 모두 김치 미식가가 되었다)

이 엄청난 작업들을 모두 퇴근 시간 이후에 해야하는데 당연히 아내 혼자서는 버거울거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김장 준비에 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대강은 알고 있다. 후다닥하면 된다는건 그나마 내가 열심히 도와줄 때나 가능한 얘기다. 모임에 나갈 분위기가 아니다. 만약 오늘 아내 혼자 하게 놔두고 모임에 갔다가는 몇일동안 가시방석 위에서 살게 된다. 눈치밥을 먹게 될 것이다. 십수년 결혼 생활을 하니 설자리 누울자리를 구분하는 직감이 생겼다. 생존력이라고 하는게 맞겠다.

그래도 나 또한 아쉬운지라 살짝 툴툴댔다. 아내도 미안한지, “내가 애들이랑 같이 할테니까 당신은 다녀와.” 한다. 저 말에 넘어가면 안된다. 여자들의 말은 해석을 잘해야 한다. ‘애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 당신이 있어야 일이 되지. 아유, 하필 오늘 모임을 잡아가지고.’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아내의 허락에 마음이 잠깐 흔들렸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내부 통역을 다시 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며 모임 불참을 선언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한결 부드러워진 아내의 목소리가 나의 해석이 맞았음을 증명한다.

오늘 저녁에 일이 무척 많을 것이다. 업무 이후에 하는 일이라 더욱 고단하기도 할 것이다. 상황이 아쉽긴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은 맛있는 김장 뿐이다. 두런두런 배추속을 넣으면서 함께 마시는 막걸리도 기대된다. 예전과 다르게 요즘은 김장 담그는 집이 드문 것 같다. 아내의 김치사랑 덕분에 우리집은 매년 옛 김장날의 추억을 재현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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