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먼저

어제밤에 남긴 글은 감정적이었다. 나의 개인 일기장에나 남길 법한 글이었다. 삭제할까 고민하다 그냥 두었다. 감정이 삽입되었을지는 몰라도 내 진심을 솔직하게 내지른 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머리속 분노의 불길을 예쁘고 아름다운 낱말들로만 표현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글이 아니다. 리더에 관한 이야기이고 인간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그 동안 쌓인 것이 폭발한 것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나는, 거의 한달이상 본업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멘탈이 나가 있었다. 내 평생 외부의 어떤 사건, 사고로 인해 그렇게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건 처음이었다.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그냥 주르르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나의 직접적인 잘못이 아님에도 아이들이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한 것 같아, 어른으로서 너무나 미안했고 심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번에 유사한 참사를 지켜보면서 많은 분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지 모른다.

그런 마음앓이를 하면서도 수많은 국민들이 묵직한 책임감으로 생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모두가 화를 꾹 눌러 참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런 사회적인 쇼크를 조금이라도 빨리 치유하는 길은 부실했던 참사 이전의 모습과 다른, 이후의 처리 과정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울분에 갖힌 다수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건 그들을 이끄는 지도층의 진심어린 반성의 모습이고 그에 상응하는 후속 조치들이다. 흔들리는 상황일수록 넓은 마음으로 다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지도층을 가진 사회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요즘 보이는, 들리는 뉴스들에는 온통 ‘책임회피’라는 낱말 뿐이었다. 오랜만에 펼쳐본 사회면의 기사들은 인내심으로 압축해둔 나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흥분하는 사람이 항상 싸움에서 패한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성을 찾고 차분한 대처를 해나가는 쪽이 대부분의 상황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만이 해답과 개선점을 찾아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다. 맞는 말이다. 분노와 울분이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는 되묻고 싶다. 격정적인 마음의 바닥을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진심이 담긴 대안들을 마련할 수 있냐고. 불의에 대한 분노의 절차없이 어떻게 절실함이 담긴 정의를 만들어갈 수 있냐고. 이성은 공감의 다음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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