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2002

오랜만에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았다. 일본 대 독일전. 놀랍게도 일본이 독일을 2-1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선진 축구클럽에서 뛰는 아시아 선수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유럽과 남미 양강 체제에 아시아가 조금씩 끼어드는 모양새다. 이제는 예전처럼 아시아 선수들이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을 만나도 기가 죽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뻥뻥 축구도 많이 사라졌다. 한마디로 많이 컸다.

그저께는 사우디가 아르헨티나에 역전승을 거둬서 이변을 일으킨 바 있다. 홈 어드밴티지나 편파 판정 없이 순수하게 실력으로 일구어낸 것이라서 이러한 이변들에 더욱 즐거워하고 열광할 수밖에 없다. 어제 경기도 전반에는 일본이 독일의 압박 축구에 상당히 고전했지만, 후반 들어 감독의 과감한 선수 교체와 특유의 티키타카 패싱이 살아나면서 결국 두터운 독일 수비를 무너뜨렸다. 모두의 예상을 깨는 경기는 언제 봐도 짜릿하다. 신기하게 일본이라는 국가를 싫어하는데 축구는 일본을 응원하게 된다. 평상시 나를 괴롭힌 우리 동네 양아치 형과 다른 동네 깡패가 주먹다짐을 하면, 그래도 동네 형 편에 서는 게 우리네 마음인가 보다.

재밌는 경기를 보고 난 후 여운이 남아서인지 좀 더 즐기고 싶어졌다. 유튜브에서 아르헨티나와 사우디 경기를 포함해 몇몇 하이라이트도 찾아보았다. 그런데 한동안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유튜브 AI가 은근슬쩍 오른쪽에 띄워 주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2002년 월드컵 영상들. 오랜만에 그때의 감동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까. 또 한번 요물 AI의 꾀임에 넘어간다. 문득 2002 월드컵의 추억들이 떠오르며 하나둘 클릭하기 시작했다. 그 감동의 현장들을 취재하고 정리한 MBC 다큐멘터리도 보게 됐다.

현재 나이가 30대 중반 이상이면 그때의 소름 돋는 하루하루를 기억할 것이다. 2002년 6월 한 달은 우리 국민 모두가 공유하는 최고의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좌와 우, 부자와 가난한 자, 지역과 학벌 그 어떤 것도 하나로 뭉친 국민을 갈라놓지 못했었다. 길을 가다 아무나 붙잡고 포옹을 하고, 모르는 사람과도 함께 구호를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일이 끝날 무렵이면 5천만 모두가 어딘가에 모여 앉아 단 하나의 마음으로 응원을 했었다. 우리 선수들이 기회를 놓치면 함께 탄식하고 골을 넣는 순간에는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뛰어대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 날들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행복했던 시간. 우리 모두가 서로 격려하고, 함께 최선을 다하고,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시간. 힘을 모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간.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희망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희열의 시간들.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집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최극단의 행복을 만끽할 기회를 누렸다는 것이. 완벽한 몰입의 순간들이었다.

오늘도 축구를 보려 한다. 우리나라 경기니 시청하지 않을 수 없다. 2002년처럼 한날한시에 동네 주민들이 한자리에서 응원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 밤에도 여기저기서 탄식과 함성이 동시에 터져 나오길 바란다. 분열과 갈등, 각자의 어려움들 모두 잊고 잠시라도 한 마음이 되길 바란다. 그때처럼. again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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