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를 배려하는 사회

어떤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을 최대치까지, 될 수 있는 한 늦추고 싶어한다. 마지막 순간의 부모에게 현대 의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시도하는 것이 ‘효’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선택해야하는 특별한 순간을 만난다. 그것이 미련에 기반한 것이든 책임에 의한 것이든, 대부분은 현대의학의 발전된 기술에 의존하며 그 선택의 순간을 뒤로 미루기도 한다.

병원은 죽음을 앞둔 환자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아주 드물게 의사 정신이 살아있는 곳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수많은 의료진을 고용하고 수십억을 대출받아 커다란 건물을 임대한 사설병원이 수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환자가 죽지 않고 연명할수록 병원의 수익은 늘어난다. 대형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지인의 말을 빌어보면, 환자 모두가 멀쩡히 걸어들어왔다가 1주일만 지나면 바보가 되고, 수많은 호스를 꽂게 되며,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게 되고, 죽음은 계속해서 뒤로 미루어진다고 한다. 물론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런 실태를 들을 때마다 아내와 나는 절대 연명치료와 요양병원은 경험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곤 한다.

나는 자주 상상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어디까지 연명치료를 해야할 것인가. 그럴 때 과연 아내의 손을 놓고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아내는 언제나 단호히 알려준다. 늘리는 시간만큼 자신에게는 고통이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잘 보내주는 것은 늘 좋은 선택이라고 망설임없이 이야기하고는, 기어코 내게 다짐을 받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아내의 다짐을 받는다. 서로 그러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과연 가능한 일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한몸같은 존재를 떠나보내는 짧은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그저 옆에서 숨만 쉬고 있더라도 웃으며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보내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로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가지는 있다. 아내의 마무리가 충분히 배려받아야한다는 마음.

최근 ‘조력 존엄사 합법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었다고 한다. 극심한 고통을 받는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칠 수 있도록 하자는 법안이다. 여론조사에서는 80% 이상이 찬성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찬성과 반대로 가를 수 있는 문제인지, 우리 사회가 ‘죽음’에 대해 과연 깊이 있는 고민의 시간을 가져보긴 한건지 의문이 든다. ‘죽음’을 단지 심장의 정지로만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한 존재의 가치있는 마무리를 위한 배려에 대해 사회 전체가 함께 생각하고 토론해본 적이 있던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서 목숨을 끊을 수 있게 하자 또는 말자 같은 단세포적 접근보다는, 더 존엄한 마무리를 위한 진중하고 의미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토론보다는 경제논리로 풀어가는 행태가 때로는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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