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꽃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생전 나를 볼 때마다 던지신 멘트가 있다.
“너는 언제 꽃이 피니?”
한두번 들은 것도 아닌데 이 말은 어린 내게 매번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나를 너무 사랑하신 할머니. 눈에 넣어도 안아플만큼,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으셨어도 결코 이름을 잊지 않은 유일한 존재일만큼, 나를 귀히 아끼셨던 할머니. 할머니의 눈에 나는 한번도 꽃을 활짝 피운 적이 없었던거다. 가을볕에 말린 시레기마냥 너무 바싹 마른 손자가 안타까우셨을거다. ‘마름’은 ‘없음’의 다른 말이던 할머니 세대의 고정관념으로, 살이 통통히 오른 맏손자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할머니 바램의 다른 표현이었다. 할머니의 마음벽에는 항상 뽀얗게 젖살이 오른 내 돌사진이 걸려있었을 것이다.

“너는 언제 꽃이 피니.”
그렇다. 10대 후반에서 20대와 30대를 지나기까지 나는 줄곧 말라깽이였다. 무우말랭이였고, 젓가락이었고, 세상의 모든 가느다란 존재는 전생에 나와 사촌인 듯 했다. 그런 내게 태연하게 던지는 할머니의 솔직함은 젊은 시절 자존감 바닥이었던 내 마음을 때로 건미역처럼 졸아붙게 만들었다. “할머니, 나는 이제 곧 활짝 피어날 꽃봉오리라 그래요.”라고 통통 받아넘길 수도 있으련만, 바늘 하나 꽂힐 자리 없던 내 좁디좁은 마음은 그 말을 여유롭게 받아치지 못했다. 피우기도 전에 말라버린 꽃잎처럼 스스로를 바스러뜨렸다.

30대까지 한번도 “너 얼굴 좋아졌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설사 얼굴이 퀭해도 그냥 듣기 좋게 한마디 던져주면 좋으련만, 할머니와 주변 지인들은 하나같이 ‘정직’이 삶의 가치관인 듯 했다. 세상 기름기 다 빨아먹은 ‘얼굴 좋은’ 상상속 누군가와 나를, 항상 비교하며 쯧쯧거렸다. 내가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그 어떤 결과도 그들의 ‘좋은 얼굴’의 기준을 넘어설수는 없었다. 솔직히 상처받았다.

40대를 넘기면서 듣기 좋은 말은 포기했다. 그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차라리 내 마음에 살을 찌우는게 빠르겠다.’ 그 누구도 내게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닐테니 아니꼽게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 3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줄곧 아이들을 키우는데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말팔매’에 무뎌지기도 했다. 마른 미역이건 젓가락이건 나라는 존재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 자체로 소중했으니까.

신기하게도 여유롭게 받아넘기기로 마음먹으니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이순(耳順)을 맞은 60대 어른처럼 모든 것이 순(順)하고 유들유들하게 들렸다. 심지어 내 마른 외모가 우리 가족 모두의 놀림 대상이 되어도 즐겁기만 했다. 막내동생놈은 펄럭거리는 바지와 점퍼를 입고 찍은 내 30대 사진을 보며 ‘인민군’같다고 말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사진의 나는 영락없이 북한에서 금방 내려온 ‘무장공비’였다. 총만 들지 않았을 뿐. 가족들이 그 사진으로 인해 한참을 깔깔대며 웃어댔다. 그 웃음들은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내 귀로 흘러들어와 행복으로 변신하며 내 안에 내려앉았다.

이제는 마음 뿐 아니라 몸에도 살을 좀 찌웠다. 40대 초입부터 헬스와 테니스, 자전거 등 운동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다. 소나기 맞은 흙길처럼 곳곳이 패어 있던 내 몸의 굴곡들을 차곡차곡 나의 땀으로 채워 넣었다. 12줄 짜리 ‘갈비뼈 기타’는 어느덧 줄이 하나둘 끊어지고 남자의 ‘갑빠’로 다시 태어났다. 운동에 소홀해질 때면 가끔 멋진 ‘갑빠’가 집을 나가기도 하지만 이제는 크게 괘념치 않고 살아간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지금의 나를 보며 무어라 하셨을까. 여전히 내게 ‘언제 꽃이 피니?’라고 물으셨을까, 아니면 드디어 ‘활짝 핀 꽃’이라고 좋아하셨을까. 어쩌면 할머니가 진정으로 보고 싶으셨던건 ‘살이 통통히 오른 내 모습’보다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는 내 얼굴’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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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da

잘 읽었습니다! 다른 포스트들도 아주 유익하게 잘 읽고 있으니 꾸준한 활동 부탁드립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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