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하얼빈’을 읽었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 민족의 영웅이 적의 가슴에 총알을 박는 역사적 순간이 이렇게 싱거울수가. 너무나 담담했다. 내가 기대했던 이야기는 영화처럼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긴장과 스케일이었다. 이토를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첩보원같은 활약과 사이다같은 암살 장면을 상상하며 책을 펼쳤다. 이토의 가슴에 총알이 박히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넘어 뿌듯함을 느끼고, 러시아 경찰과 일본 헌병에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만세를 외치며 굽히지 않는 그 용기에 감탄하는 나를 상상했다. 이것이 우리가 영웅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일종의 청량감.

우리는 보통 위인 전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 영웅이 악을 처단하는 선과 악의 선명한 대결. 이토는 악이고 안중근은 일반인을 넘어서는 초현실주의 인물이어야 한다. 그의 총구를 통해 발사된 총알은 한반도의 평화를 빼앗아간 악마에 대한 복수이고 시대를 초월한 명분을 가진다. 우리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그를 차원이 다른 비범의 대열에 우리의 방식대로 올려놓는다. 그는 우리와 달라야 한다.

과연 진정한 ‘인간’ 안중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천주교의 독실한 교인으로서 신앙에 배치되는 살인을 저질러야하는 순간 그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무엇이 그것을 넘어 그를 하얼빈으로 인도했을까. 검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까지 ‘인간’ 안중근은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던 것일까. 한 여자의 남편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안씨 문중의 장남이었던 그가 이토를 쏘고 난 후에 겪을 가족들의 고초에 대해 어떻게 감내한 것일까. 두렵지는 않았을까. 암살에 실패할 경우와 성공할 경우, 각각의 상황에 대해 그는 어떤 시나리오를 생각했을까. 이토를 쏜 후 벌어지는 기나긴 재판과 고난을 거쳐 사형장에 끌려가는 그 날까지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 느꼈을 그 무거운 고독감을, 대의에 대한 뜨거운 책임감만으로 모두 덮을 수가 있었을까.

‘인간’ 안중근에 집중하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생긴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느끼는 호기심이도 하고, 나를 대신하여 희생한 사람에 대한 존경과 존중감이기도 하다. 그도 나와 다르지 않은 작은 인간임을 알기에 오랜동안 허우적댔을 그의 방황에 연민의 정 또한 느낀다. 이는 결코 총알 3발의 압축된 통쾌함으로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얼빈’을 통해 우리는 영웅물과 다른 측면에서 안중근을 바라볼 수 있다. 김훈 작가는 ‘인간’ 안중근을 쓰고자 했다. 그래서 담담하다. 단 몇초안에 벌어지는 총구의 불꽃보다 방아쇠를 당기기까지의 안중근을 이해하려 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교과서 한줄의 이벤트보다는, 대의를 위해 고뇌하고 삶을 바쳤던 지극히 평범한 역사속의 한 인간을 만날 수 있다.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殺)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이 세상에서 이토를 지우고 이토의 작동을 멈춰서 세상을 이토로부터 풀어놓으려면 이토를 살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안중근은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생각은 어둠의 벽에 부딪혀서 주저 앉았다. 생각은 뿌연 덩어리로 엉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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