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퀄라이저

고급 레스토랑 안쪽에 마련된 사무실로 한 흑인 남자가 들어온다. 그 안에서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너댓명 남자들이 잡담을 하고 있다. 저마다의 손에는 총이나 칼이 들려 있고 몇몇의 드러난 몸에는 현란한 문신이 보인다. 흑인 남자는 단추를 단정히 채운 검은 난방을 입고 오른손 약지에 작은 반지를 끼고 있다. 낯선 남자의 등장에 모두의 눈길은 그를 향한다. 웬 듣보잡이 함부로 자기들 사무실을 들락거리느냐는 눈치다.

흑인은 조직의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가 두툼한 봉투를 내민다.
“9,800 달러를 주지. 현찰이야.”
“내게 9 천달러를 준다고?”
“9,800 달러. 현찰”
“왜지?”
“그녀를 놔줘.”
방안의 남자들이 모두 웃는다.

“이거 또라이 아냐? 그 년 값으로 9천을 내겠다고? 망할 미국놈들. 돈이면 다 되는줄 알아? 돈 몇푼으로 러시아 여자를 사겠다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착각하지마. 그 년은 아직 어려서 이런 푼돈쯤은 2주면 벌 수 있어. 그 돈 가져가서 니 xxx 하는데나 써. 미친놈. 꺼져.”

협상은 결렬된 듯 하다. 흑인남자는 돌아서 사무실을 나가는 듯 하더니 잠시 멈춘 후, 천천히 안쪽에서 문을 잠근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고 사무실의 모든 사람과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 물건들의 위치와 상태를 스캔한다. 마치 그것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16초.”
손목시계 타이머를 누른 후 그는 이 한마디와 함께 터벅터벅 두목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시간의 흐름을 세어가면서.

사무실의 갱들도 분위기를 알아챈 듯 각자의 총과 칼을 들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흑인은 그를 막으려 달려드는 조직원의 팔을 순식간에 비틀어 그의 총으로 두목의 목에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은 반사적으로 막은 두목의 손바닥을 뚫고 그의 목에 구멍을 냈다. 뒤이어 덤비는 남자의 눈에는 술잔을 박아주고, 찌르려 달려드는 칼잡이의 손을 꺾어 거꾸로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는다. 곧바로 그 칼을 빼냄과 동시에 오른편에서 달려드는 금목고리 남자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버린다. 가슴에 칼을 맞았던 남자가 다시 달려들 때 흑인은 손에 든 칼을 그의 목에 꽂는다. 뒤이어 머리가 긴 조직원이 술병을 깨서 위협하며 달려들자 흑인은 스파이럴 모양의 와인따게로 그의 가슴과 목을 사정없이 찌른다. 모두가 쓰러지고 싸움은 순식간에 끝이 난다.

흑인은 타이머를 멈춘다.
“19초”
예상보다 조금 늦었다는 듯이 쭈뼛한 표정을 짓고는 쓰러져있는 두목에게 다가간다. 목에 총을 맞은 두목은 아직 숨이 남아 있다. 목에서는 검은 피가 계속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다. 흑인은 옆에 털썩 앉으며 말한다.

“심장박동이 빨라진건 출혈이 심해서야. 30초 후면 몸이 굳어지면서 숨통이 막히지. 그녀의 삶은 계속되겠지만 네 삶은 여기서 끝나. 이 더러운 바닥에서 9,800 달러때문에… 돈을 받았어야지.”
“너… 누구냐…”

두목의 눈은 흐려지고 차츰 숨이 멈춘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흑인은 괴로운 듯 고개를 저으며 누군가에게 속삭인다. “미안해.”

맥콜(덴젤워싱턴)은 전직 국방정보국의 요원이다. 폭발테러로 사망처리된 후 평범한 사람으로 새 삶을 살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아내와 사별한 후에는 그녀의 습관을 따라 100 가지 인생책들을 읽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삶의 목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밤이면 매일 책을 들고 24시간 카페로 향한다. 맥콜은 매일 드나드는 그 곳에서 가수가 꿈인 어린 콜걸 알리나를 만난다.

“무슨 책이에요?”
“기사의 이야기지. 기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사는.”
“내가 사는 세상과 똑같네요.”

알리나는 지옥같은 매춘부의 삶을 빨리 끝내고 자신의 앨범을 내는 것이 꿈이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술취한 손님과 포주의 학대에 매일같이 시달린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죽은 아내와 약속했던 맥콜은 어느날 알리나에 대한 포주의 잔혹한 학대를 목격하고 그녀를 돕겠다는 결심을 한다.

맥콜이 갱단을 심판하고 죽이는 장면들은 무척이나 잔인하다. 화면을 보다가 수시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러면서도 계속 이런 류의 영화를 찾는 것은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뉴스를 볼 때마다 느끼는 고구마같은 답답함은 이런 영화를 보며 해소할 때도 있다. 본시리즈, 아저씨, 리옹, 택시 드라이버 등 영화에 등장하는 첩보원, 전직 요원, 군인들의 목숨을 건 행동들은 모두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에서 시작한다. 얼마나 통쾌한가. 절대선이 절대악을 심판하는 그 장면들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이런 시나리오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간교하고 약삭빠른, 그래서 적응력이 뛰어난 강자들이 판치는 세상은 ‘착한 것’이 살아남기에 너무나 험난하다. 때로는 왜 하느님이 태초에 ‘착한 것이 살아남는 진화의 법칙’을 이 땅에 심어놓지 않으셨을까하는 의문과 원망이 함께 고개를 든다. 영화 속 맥콜이 선한 눈빛으로 세상을 보면서도 때때로 단호하게 악을 단죄하는 모습은 나에게 대리만족을 준다. 현실 속에도 이러한 이퀄라이저가 있다면 세상이 좀더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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