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묘지

얻어터지기 전에는 누구나 전략이 있는 법이다.
타이슨의 말이다. 타이슨에 대해서라면 한때 빼어난 권투선수라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한오가 이 얘기를 해줬다. 한오는 아는게 많았다. 어찌나 많은지 타이슨이 어린 시절 새를 키운 것도 알았다. 애지중지 키운 새를 누군가 죽였는데, 타이슨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향해 주먹을 날린 게 그때라고 했다. 타이슨의 말이다. 타이슨에 대해서라면 한때 빼어난 권투선수라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한오가 이 얘기를 해줬다. 한오는 아는게 많았다. 어찌나 많은지 타이슨이 어린 시절 새를 키운 것도 알았다. 애지중지 키운 새를 누군가 죽였는데, 타이슨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향해 주먹을 날린 게 그때라고 했다. - 포도밭 묘지, 편혜영

올해 김승옥 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편혜영의 ‘포도밭 묘지’는 네명의 상고 출신 여성들의 이야기다. 한오와 수영, 윤주, 그리고 나(화자). 넷은 같은 반 친구 사이다. 상고진학이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집안 형편상,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여상 이외의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 그들의 부모들은 어려운 형편에 고졸 학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부모의 울타리에 있었고, 그들은 그 경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학창 시절의 모든 것들은 ‘취업’이라는 목표에 맞추어졌다.

그들 넷의 목표와 살아가는 방식은 제각기 달랐다.

친구들 사이에서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오는 가장 높은 목표를 향한다. 은행에 취업한 후에도 창구보다는 중앙부서로 이동하고 싶어 야간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승진을 위한 실적을 쌓기 위해 많은 힘을 쏟는다. 그녀는 전략이 남달랐고 목표를 위해 부지런함을 잃지 않았다. 가끔은 자신감이 넘쳐 친구들 사이에서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직장에서 그의 대학공부는 인정받지 못했고 자신보다 늦은 대졸 동료들보다 진급이 처져 오랫동안 고졸출신 행원으로 머물러야 했다. 자신감 넘치던 한오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리던 어느 날 휴게실에서 창구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그녀의 유골함은 안치단의 맨 아래에 놓여졌다.

수영은 한오보다 성적이 좋은 유일한 친구다. 다만 ‘용모’ 기준 미달로 면접에서 매번 쓴잔을 마시고 자신감을 상실한다. 상고 출신에게 ‘용모, 성적, 자격증’은 3대 필수 요소다. 결국 자신의 목표를 낮추고 또 낮추어 백화점 판매직으로 취업하지만 채 2년을 버티지 못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함께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한다. 잘게 쪼갠 시간으로 준비하는 공무원 시험에서 번번히 낙방하는건지, 다른 친구들은 아직 그녀의 합격소식을 듣지 못했다.

윤주는 반항아적 기질이 있다. 교복에 새겨진 로고가 마음에 안든다며 학교생활 내내 불평을 했고, 창구에서 돈이나 세는 일 따위에 인생을 걸고 싶지 않다면서 특이하게 종합상사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꼼꼼한 성격이 아니었다. 친구의 책을 빌려갔다가 까먹기도 하고, 때로 엉뚱하고 어설프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직장에서 ‘신용장 오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자칫 말단인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뒤집어 씌워질 수도 있는 상황에 어쩔줄을 모른다. 그 때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해결해준 열세살 연상의 상사가 남편이 되었다. 직장생활이 싫어 결혼 후 그만둔 윤주에게 결혼 생활은 또 다른 난관이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게 무시당하고 아랫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한오의 죽음 후 오랜만에 만난 윤주는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고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나(화자)는 항상 자신이 없고 성적도 좋지 않다. 졸업 후의 목표도 가장 낮은 곳을 향하고 있어서 취업에는 가장 먼저 성공했다. 하지만 백화점 판매직으로서의 삶에 만족은 없었다. 화장실로 자리를 비우기도 힘들었고, 하루 종일 서서 근무하고 나면 발이 퉁퉁 붓고 손에서 발냄새가 났다. 이직이라 함은 이쪽 백화점에서 저쪽 백화점 판매직으로의 수평 이동 뿐이다. 상승은 없다. 화자는 서로가 바쁜 가운데서도 친구들을 꾸준히 관찰하고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녀 또한 지쳐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가 빠지고 눈 밑이 까매지고 우울증약으로 몸이 붓는다.

그녀들 각자의 전략은 달랐다. 하지만, 결국 모두 같은 지점에서 만났다. 포도들이 까맣게 죽어 있는 어느 포도밭에서.

우리 모두는 나름의 전략을 가지고 살아간다. 달리다보면 언젠가 높은 곳에서 평안히 세상을 둘러볼 수 있을거라는 꿈을 꾼다. 학창시절, 갈망하는 이상이 어디이든 그 곳은 땀으로 도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10년 후, 20년 후에는 지금보다 나을거라는, 원했던 그 곳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 그리고는 인생이라는 링위에서 젊음을 바친다. 세상은 상수가 아니라 변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또한 절대 불변의 상수가 곳곳에 즐비하다는 것도 모른 채로.

우리 중 누군가는 헤어날 수 없는 링 안에서 지금도 쓰러질 때까지 실컷 얻어터지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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