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기스 중고품

오늘 건강검진 받으러 간다. 어제 저녁 맥주한캔 따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정신없이 보낸 하루의 마무리 술한잔은 신경안정과 수면에 도움이 되어 건강에도 좋을거라는게 내 추측이다. 그 추측과 과학적 측정의 결과가 다르다는게 문제지만. 결국 좋은 수치를 얻기 위해 마음을 접었다.

30대까지는 설레는 마음으로 검진 결과지를 받아쥐었다. 마치 올백(all 100)의 성적을 기대하는 우등생의 마음이랄까(올백은 나와 다른 우주의 얘기라서 솔직히 그 마음이 어떤건지 전혀 모른다). 건강에 자신했던 불과 10여년 전에는 공부를 안하고도 전교 일등하는 수재의 거만함이 있었다. 결과지가 집에 도착하면 아내 앞에서 봉투를 뜯으며 괜시리 거들먹거렸다. 안봐도 전교 일등, 뭐 그런 심정이었다. 의사 소견란에는 ‘이상 없음’이나 ‘의견 없음’처럼 넓은 공간에 몇 글자 적히지도 않았다. 그 여백이 심심했다. 내 몸은 의사의 트집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래프 위 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응원한 적도 없는데 과감하게 우상향의 곡선을 그렸다. 정상, 정상으로만 체크되어 있던 각종 수치에 가끔 ‘주의’라는 낯선 낱말들도 눈에 띈다. 내 몸의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점은 가까스로 ‘정상’과 ‘주의’를 가르는 담벼락에 걸쳐 있었다. 살짝만 방심하면 홍길동처럼 담을 넘을 기세다.

검진의 눈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는 작은 돌기들이 늘어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쉽게도 이제 내 몸은 갓나온 신제품이 아니다. 당근마켓에 싸게 내어놓아도 찾는 이가 별로 없는 ‘생활기스 있는’ 중고품인 것이다. 이제부터 받게 될 성적표는 손을 떨며 뜯어야할지 모른다. 의사 소견란에 넓게 자리잡았던 여백들은 사라지고 빽빽하게 장편소설이 들어차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해진다.

그래도 수십년동안 불평 한마디 없이 잘도 견뎌주었다. 큰 탈없이 내 삶을 너끈히 받쳐주었다. 조금 낡았을지는 모르지만 나와의 궁합도 제법 잘 맞았고 무엇보다 정이 많이 들었다. 어떻게든 더욱 갈고 닦아 오랫동안 함께할 생각을 해야지, 일생을 잘 써먹고 이제와서 낡았다고 구박하면 내 몸이 억울해할 것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손길로, 고마운 마음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다, 내 몸아. 오늘 검진 잘 부탁한다.”

ps> 담배로 괴롭혀서 미안하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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