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안녕~

오늘 보일러 기사 아저씨가 방문할 예정이다. 늦가을 녘, 이제 귀뚜라미를 보내고 대성셀틱으로 갈아탄다. 귀뚜라미는 1주일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이틀전에 드디어 운명하셨다. 지난 주 며칠 동안 우리는 여러번의 응급 상황을 맞았다. 숨이 넘어가려는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듯, 간당간당한 보일러를 여러번 리셋하거나 플러그를 뺐다 꽂으며 목숨을 연명시켰다.

억지스러운 생명 연장은 화를 부른다. 급기야 그저께는 보일러실에서 타는 냄새가 나고 물이 새기 시작했다. “아빠, 이거 무슨 냄새야? 고기굽는 냄새는 아닌데...” 무심히 던진 둘째 아이의 말에 부랴부랴 탐사견처럼 냄새의 근원을 찾아가보니 범인은 보일러였다. 귀뚜라미는 연신 연기를 뿜고 있었다. 마치 거북선처럼.

전기에는 영 젬병이인데다가 무섬증이 있는 나는 보일러와 연결된 모든 선들을 후다닥 제거했다. 휴우. 재빠른 조치에 스스로 으쓱하며 돌아서서 아내 얼굴을 보았는데, 어쩐지 섬뜩했다. 그녀는 입구에서 날카로운 도끼눈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아마도, 기사님을 빨리 불러야하는데 바쁜 나머지 늑장 대응으로 일을 키운 내게 책임추궁을 하고 있는 것일게다. 나는 눈을 옆으로 돌리며 괜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마 그 눈빛에 당당하게 맞설 수 없었다.

그래도 집이 홀라당 타버리는 것보다는 따뜻한 물을 못쓰는 편이 낫다고 말같지 않은 변명을 했다. 천명은 어쩔 수 없구나. 이제 귀뚜라미를 놓아주기로 했다. 떠나려는 것을 자꾸만 잡아끌어내리니 스스로 영양줄을 끊은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천수를 누렸으면 자연의 이치대로 편안히 보내주어야 한다.

사실 이렇게 보일러를 떠나보내는 상황을 마주하며, 웃기게도 나는 글쓰기를 먼저 생각했다. 어떤 방향으로 글을 쓸지 머리가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이게 웬떡인가. 평범한 일상속에서 이런 대형 이벤트라니. 귀뚜라미를 보내는 섭섭함과는 별개로 마구마구 쏟아지는 글감에 온 정신이 기울었다. 귀뚜라미와 대성셀틱의 차이점에 대해 써볼까. 에이, 그건 재미없겠다. 그러면 보일러가 없던 시골살이 시절 엄마가 고무다라에서 목욕시켜주시던 기억을 써볼까. 오래쓰던 정든 물건과의 애틋한 이별이야기는 어떨까. 글에 대한 생각들이 정말 마인드맵 가지처럼 뻗어나갔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썼다.
그냥 주절주절. 나오는대로. 느꼈던대로.
드디어 오늘 오후부터는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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